2025년 9월 철거된 기존 대사관은 1963년 대한민국과 로마 교황청이 정식 수교한 뒤,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다만 세월이 흐르며 건물이 낡고, 늘어나는 외교 행사를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해 재건축 계획이 추진됐다.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다.
설계는 장소가 가진 역사와 문화 맥락을 존중하며 시작했다. 주한교황청대사관이 자리한 서울 궁정동은 경복궁 바로 옆, 인왕산을 마주하며 한국 전통 건축의 미학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우리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 담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설계 원칙으로 삼았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한 이 건축 철학—절제된 형태, 천연 재료, 자연과의 조화—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교황청이 지향하는 평화·대화·연대의 정신을 건축 언어로 풀어냈다. 복잡한 요소 대신 재료 본연의 물성과 단정한 비례와 질서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건물은 주변 경관을 압도하지 않으면서도 경복궁과 인왕산이 만드는 풍경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시간을 견디는 재료 - 100년을 바라보는 건축
재료를 선정할 때 지속가능성과 영속성을 추구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재료의 질감과 색채가 함께 깊어지고, 시간을 견디는 건축을 지향했다. 외장엔 따뜻한 베이지 톤의 베네시안 골드 화강석을 선택했다. 은은한 베이지 톤이 특징인 이 석재는 주변 경관과 색채 조화를 이룬다. 화려한 색채로 시선을 끄는 대신, 낮에는 빛을 품고 밤에는 은은한 반사로 도심 속 평화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지붕엔 천연 슬레이트를 사용했다. 진흙과 점토가 수천만 년 동안 압력을 받아 만들어진 천연 암석으로 100년에서 200년을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닌다. 다크그레이 슬레이트 지붕과 베이지 석재가 어우러진 외관은 고요하면서도 인상적인 풍경을 만든다.
정원에서 시작되는 의전
대사관의 진입은 정원을 거쳐 시작된다. 공식 만남과 사적 휴식 사이에서, 도시의 속도와 대사관의 고요함 사이에서, 방문객에게 마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전이 공간이다. 정원을 지나 건물에 다가서면 1층 필로티 구조가 드러난다. 필로티는 유연한 접근성을 제공하면서도 주차 공간을 확보하는 합리적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건물을 가볍게 띄워 올려 개방감을 주는 건축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원을 지나 필로티를 거쳐 메인홀에 이르는 순차적 공간 경험은 품위 있는 의전 서사를 만들어낸다.
기능과 상징을 담은 공간 구성
신축 대사관은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 규모로 계획했다. 지하층에는 항온·항습 시스템을 갖춘 아카이브 공간을 마련했다. 기계실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 공간으로 설계해 보존 환경을 최적화했다. 1층은 필로티 구조로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의전과 보안 절차를 고려해 대사관 메인 로비와 수녀원 부속시설 동선을 분리했다. 2층에는 대사와 참사관들의 집무 공간을 포함해 주요 업무 시설을 모두배치했다. 중심에 자리한 중정은 3층까지 이어지는 수직 공간으로 100명 규모의 외교 행사를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소규모 예배당을 함께 구성해 일상 업무 속에서도 영적 중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3층에는 회랑과 대사 관저,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선다. 게스트룸은 총 4개로 6명이 머물 수 있도록 구성했으며, 수녀님들의 숙소는 기존 시설보다 훨씬 개선된 생활 환경을 갖췄다.
정원을 거쳐 시작되는 진입, 열주가 만드는 빛과 그림자의 리듬, 중정을 통해 내려오는 빛이 안팎으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시퀀스를 의도했다. 외교 공관의 공식 기능, 종교 시설의 영성, 거주 공간의 일상. 각 프로그램은 독립적으로 운영되지만 빛과 녹음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순례 동선처럼 이어진다.
자연광과 재료 본연의 아름다움을 건축 전반에 녹여 신성함(Holiness)과 환대(Hospitality)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계획한 새로운 주한교황청대사관은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2027년 1월 자리 잡을 예정이다.





